도서관에선 쉿, 조용히? 읽고 멍 때리고 산책하고 음악 듣는 ‘라이프러리’ [.txt]
.txt 커버스토리개방감 있는 건축과 특화된 전략으로 많은 도서관이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은 전북 전주 아중호수도서관. 전주시 제공이제 막 도착한 초여름 햇살이 수면 위로 반짝인다. 소곤거리는 대화와 낮은 피아노 선율이 창밖 호수의 파장만큼 잔잔히 울려 퍼진다. 적당한 백색 소음은 모두를 무장 해제시킨다. 아빠는 이미 계단식 벤치 위에서 반쯤 누운 채 까무룩 낮잠에 빠졌고, 곁에 드러누운 소년은 아빠에게 기댄 채 그림책 속 세상에 푹 빠졌다. 전북 전주시 아중호수도서관 서가에 꽂힌 8천여권의 장서는 차례로 그들에게 읽힐 시간을 재촉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서관을 “낙원”이라고 한 이는 보르헤스였던가. 낙원처럼 온전한 휴식이 거기 있었다.지난 9일 아중호수도서관에서 만난 직장인 김소은(가명·32)씨는 그 축복 같은 휴식을 만끽할 줄 아는 이다. 전북의 다른 지역에 사는 그는 지난해 이 도서관이 문을 연 뒤 평일 연차를 내고 종종 혼자서 도서관을 찾는다. “학교 다닐 땐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곤 했는데, 작년에 이곳에 와보고 공간이 주는 매력에 푹 빠졌어요. 집 앞이라면 매일이라도 올 수 있을 것 같아요.”이날도 김씨는 노트북을 펼쳐 놓고 콘텐츠를 보다가, 영화 관련 책을 읽으며 평일 연차의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음악 특화 도서관인 이곳엔 500장이 넘는 음반도 구비돼 있어 직접 엘피(LP)를 가져다 청음할 수 있다. 책을 읽다가 몸이 근질거리면, 수변 공간에 마련된 산책로를 신나게 걷다 들어오면 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호수 멍’ 하며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라니, 김씨는 “혼자만 공짜로 누리는 게 미안해서 에스엔에스(SNS)에도 열심히 홍보했다”고 했다.김씨의 말처럼 도서관은 한때 ‘공부하는 열람실’로 대표되는 공간이었다. 팔꿈치도 펴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한 책상에 둘러앉아 시험 준비에 몰두한 이들의 모습이 도서관의 풍경을 대표했다. 책장 넘기는 소리, 신발 끄는 소리에도 서로의 신경이 예민해지던 회색빛 공간이다. 하지만 30년 도서관 운동의 성과로 전국 곳곳에서 도서관이 사랑방으로 거듭나고, 최근 몇년 새 지방자치단체들 역시 감각적인 건축 공간에 ‘돈’을 쓰기 시작하면서 공간 그 자체로 매력적인 도서관들이 잇달아 문을 열어 애서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전국에 누구에게나 개방된 도서관은 8천여곳이다.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을 전문가들은 ‘선불제 공공서비스’라고 강조한다. 다가올 여름, ‘책멍’을 위한 도서관 피서를 떠나보자. 그래픽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특히 아중호수도서관을 비롯한 몇몇 도서관들은, ‘간 김에 들르는 곳’이 아니라 도서관이 여행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산과 숲, 바다 전망을 자랑하는 도서관들이다. 책을 좋아하는 두 건축가가 쓴 ‘도서관 산책자’(반비)를 보면, 서구의 유서 깊은 도서관들은 시민들의 접근이 쉬운 중심부에 자리 잡은 반면, 도시 개발 이후 세워진 우리 도서관들은 높은 땅값 때문에 도시 외곽 공원과 산 아래에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한계가 최근엔 되레 도서관과 여가 활동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숲을 끼고 있는 도서관은 서울에도 많다. 광진구 아차산숲속도서관, 성북구 오동숲속도서관, 중구 다산성곽도서관 등이다. 앉을 곳이 100석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서관들이지만 산책과 책 읽기를 함께 하기에 맞춤하다. 바다를 접한 해양 도시에서는 바다 전망 도서관이 인기다. 인천의 국립인천해양박물관 해양도서관이나 부산의 다대도서관, 경남 창원 마산지혜의바다도서관에서는 뻥 뚫린 통창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다. 어지간한 해변 카페와는 견주기 어려운 수준이다.광역 공공도서관이 아니라도 쉼과 책 읽기를 모두 누릴 수 있는 도서관은 많다. 사진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브라이튼도서관. 영등포구 제공새로운 도서관들은 라이브러리를 넘어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인 ‘라이프러리’다. ‘공부’뿐 아니라 ‘여가’에 맞춤하다. 책 읽는 공간을 넘어, 만남과 쉼, 문화 활동, 체육과 창작 활동까지 모두 아우르는 “도시 거실”이고, 움베르토 에코가 기대하듯 ‘우연한 발견’이 일어나는 곳이다. 창작 공방인 ‘메이커스페이스’를 갖춘 도서관은 전국에 수두룩하고, 충남도서관처럼 도서관 내에 어린이를 위한 물놀이 시설을 갖춘 곳도 적지 않다. 이런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주세요” 같은 말들이 구태의연하다. 소란을 피우지 않는 선에서, 북카페처럼 대화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유럽 도서관들에서나 보던 개방형 서가, 높은 층고를 갖춘 ‘느좋’(느낌 좋은) 도서관의 건축은 이를 뒷받침한다. 자유롭게 배치된 의자들, 곳곳에 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작은 휴게 공간은 대화하는 도서관을 지향한다. 나선형 구조의 지상 5층 규모로 건축된 경기도서관, 홍성의 충남도서관, 부산의 주례열린도서관 등이 전통적인 도서관의 답답하고 폐쇄적인 구조를 벗어나, 건축 그 자체로 새로운 도서관들이다. 서울 영등포구가 민간으로부터 기부채납받아 마련한 여의도 브라이튼도서관 역시 구립 도서관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세련미로 소셜네트워크 ‘스레드’ 등에서 회자되고 있다. “도심 속에서 누구나 편히 찾아와 머무를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을 지향한다는 브라이튼도서관은 삭막한 여의도 금융가에서 오아시스 구실을 하게 될 것 같다.도서관의 세 요소를 흔히 책(장서), 시설, 사람(직원)이라고 한다.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마련된 하드웨어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소프트웨어다. 그런 의미에서 콘셉트가 확실한 특화 도서관도 하루쯤 휴가를 내어 들러볼 만하다. 문화도시를 표방한 경기 의정부시의 ‘의정부미술도서관’과 ‘의정부음악도서관’은 특화 도서관의 모범 사례로, 지역 바깥의 발길을 끌어모으는 마중물 구실을 하고 있다.개방감 있는 건축과 특화된 전략으로 많은 도서관이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은 경기 의정부미술도서관. 엄지원 기자3층 높이의 의정부미술도서관 건물은 대형 통창을 통해 햇살이 쏟아지는데, 예술 책들을 구경하기에 알맞다. 2019년 문을 연 도서관 현관에 들어서면, 영국 현대미술 거장인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담은 초대형 아트북이 방문객을 맞는다. 9천부 한정 제작된 도록은 가로 50센티미터, 세로 70센티미터의 크기로 무게만 35킬로그램에 이른다. 호크니 도록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책인데 이를 보유하고 공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도서관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외서를 포함한 5만7천여권 장서 중 대부분을 예술·건축 분야 자료로 채우고 있는데, 북카페처럼 자유롭게 배치된 1층 서가에서 온종일 예술에 대해 공부해도 질리지 않을 듯하다. 의정부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대학생 최정인(22)씨는 “학교 도서관보다 이곳을 더 자주 이용한다”고 했다. “카페에 가면 음악 소리와 소음 때문에 시간을 오래 보내기 어려운데 도서관에서는 하루 종일 있어도 편하고, 서가를 둘러보다가 생각하지도 못한 책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요.” 에코가 말한 ‘우연한 발견’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키케로는 “당신이 정원과 서재를 가졌다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원과 도서관은 사실상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인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도서관은 ‘가는 사람만 가는 곳’이다. 2024년 국민여가활동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은 카페나 헬스클럽, 대형마트는 자주 가지만 ‘도서관에서 여가를 보낸다’는 응답은 1.5%에 지나지 않았다. 목욕탕(2.0%), 종교시설(1.9%)보다도 낮은 수치다. 전국에 누구에게나 개방된 도서관이 8천여곳(국립도서관 4곳, 공공도서관 1328곳, 작은 도서관 6830곳)인데도 그렇다.도서관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시민들의 인식은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공부하거나 책을 읽는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탓에, 머물고 쉬고 즐기는 공간으로서 도서관을 찾는 시민은 많지 않다.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예산을 들여 매력적인 공간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시민들이 도서관을 더 자주 찾도록 내용을 채울 차례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용훈 한국도서관사연구회 회장은 “2025년 기준, 공공도서관 연간 이용자 수는 2억3053만명 정도이고, 같은 해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도서관 이용 경험’을 보면 성인은 13.8%, 학생은 84%였다”며 “이 같은 수치를 종합하면, 여전히 시민들에게는 도서관이 ‘조용히 책 보는 곳’ ‘공부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광역 공공도서관이 아니라도 쉼과 책 읽기를 모두 누릴 수 있는 도서관은 많다. 사진은 서울 광진구 아차산숲속도서관. 서울시 제공이 회장은 시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도서관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서관의 내용’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도서관에서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준 높은 학문 자료와 깊이 있는 정보까지 제공할 수 있다. 전문성과 책임 윤리를 갖춘 직원(사서)들이 시민과 만나는 접점을 넓혀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일수록 그런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아울러 이 회장은 공공도서관은 “선불제 공공서비스”라고 강조했다. “다른 공공서비스는 후불제도 많지만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도서관은 완전한 선불제이고,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도서관에 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만큼 좋은 공공자원을 누릴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이 기사는 도서관에서 써졌다. 기사를 쓰는 동안, 음악을 듣거나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거나 한번도 본 적 없는 책들을 펼쳤다. 전국에서 8천개의 도서관이 당신을 기다린다. 올여름에는, ‘느좋’ 도서관 도장 깨기에 나서보면 어떨까.전주 의정부/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기사에 도움받은 책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 l 이용훈·이권우·이명현·이정모 지음, 어크로스(2025)도서관의 말들 l 강민선 지음, 유유(2019)도서관 산책자 l 강예린·이치훈 지음, 반비(2012)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 l 조금주 지음, 나무연필(2017)더 라이브러리 l 스튜어트 켈스 지음, 김수민 옮김, 현암사(2018)슈퍼 라이브러리 l 신승수 외 지음, 사람의무늬(2014)